≪바람쏘이기≫/저절로

불영사에 얽힌전설

정주리 2011. 5. 11. 11:27

 

노인과 여덟 동자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화엄법회를 열고 교화에 힘쓸 때였다. 어느 날 노인 한 사람이 8명의 동자를 데리고 의상대사를 찾아왔다.
『대사시여! 우리는 동해안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옵니다. 이제 인연이 다하여 이곳을 떠나면서 스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 동안 불법을 수호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승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그 동안 저희들은 이곳에 부처님을 모시고자 원을 세웠으나 인연이 닿는 스님이 없어 원력을 성취 못했습니다. 떠나기 직전에 스님께서 오시어 친견케 됨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화엄법계로 장엄하려는 스님의 뜻을 저희들이 살아온 도량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시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소승에게 불사의 인연을 맺도록 해주셨으니 여한을 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상법사의 대답을 들은 호법신장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며칠 후 의상대사는 동해안의 불사 인연지를 찾아나섰다. 포항에 도착하여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는데 어디선가 한 마리 용이 나타났다. 용은 의상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더니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스님이 울진포 앞바다에 다다르자 용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울진포 앞바다에는 오색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사모하다 용이 된 선묘룡이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스님! 어서 오세요.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지금의 천축산 입구에서 선묘룡은 문득 멈추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어려우시더라도 손수 인연지를 찾으셔야 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선묘룡은 훌쩍 사라졌다.
8일간 천축산을 돌아보며 절터를 찾던 의상 스님은 피로에 지쳐 어느 연못가에 쉬고 있었다. 문득 못쪽을 바라보던 스님은 그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연못의 물 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비치고 있지 않은가.
감격한 의상 스님은 그 자리에서 수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는 부처님 영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주위를 살펴보니 마치 부처님 형상과 꼭 같은 바위가 하나 서 있었다.
그때 의상은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 이곳이 바로 호법신장들이 기거하며 불법을 수호하던 못이로구나. 이곳에서 화엄대법회를 열고 가람을 세워야지.』
의상 스님은 우선 노인과 8명의 동자 호법신장들을 위해 《화엄경》을 독송하고 그 뜻을 설하기 시작했다. 그때 노인과 8명의 동자가 못속에서 올라와 열심히 설법을 들었다.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천축산에 계실 당시의 형상과 똑같으며 연못에 비친 부처님 영상은 천축산서 설법하시던 부처님 모습입니다. 주위 환경은 영산회상이 응화된 것이지요.』
설법을 다 들은 노인은 의상 스님에게 그곳에 대한 설명을 하고는 동자들과 함께 용으로 변하여 승천했다.
의상대사가 주위를 살펴보고 산세가 노인의 말대로였다. 북으로는 연꽃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고 부처님의 형상과 비슷한 바위와 탑들이 마치 설산 당시의 부처님 회상 같았다.
스님은 용들이 살던 연못을 메워 금당을 짓고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불영사라 이름했다. 부처님 영상이 나타난 곳에는 무영탑을 조성했다. 지금도 무영탑이라 불리는 3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상대중석(上臺中石) 네쪽 중 두쪽은 없는 상태다.
연못에 비친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는 불영암 또는 부처바위라 불리우고 탑 모양의 바위는 탑바위, 연꽃 형상의 봉우리는 연화봉이라 명했으며 산 이름은 천축산이라 지었다. 또 불영사 계곡을 흐르는 광천계곡은 일명 구룡계곡이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불영사에는 두 차례의 이적을 보여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불영사 현판에 얽힌 전설
경북 울진의 산자수명한 불영계곡에 위치한 불영사.. 이불영사 안에 환생전이라는 큰방이 한칸있는데 그방의 현판인 흰희요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을 놓고 불영사탑앞에서 불철주야 삼일동안 기도를 하고 돌아가신 영혼이 되살아난후부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유래를 들어보면.. 옛날 서울남산골에 이춘식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이선비는 생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책만 읽을뿐이어
집안 형편이 가난하길 말로 다할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래서 생활은 그의 아내 강씨부인이 시골친정을 드나들면서 구걸을 하다시피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씨부인은 불심이 깊어 가난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찰에 다니지는 못하여도 집에서 혼자 참선과 염불을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부처님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이 벼슬을 하게되면 꼭 잊지않고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공부하는 스님들 시봉도 들며 불사에 성심 성의껏 보시하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올렸다. 이런 부인의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듬해 남편이 장원급제하여
경상도 울진부사로 부임하게되었다 그러나 부임한지 3일만에 이렇다할 병도 없이 갑자기 남편이 죽고 말았다 강씨부인의 애통함은 이루 다 말할수가 없어 울고 또 울다가 상가에 모여있는 육방관속들에게 근처의 절을 물으니 불영사를 일러주는지라 그즉시로 남편의 죽음이 너무 애통하니 마지막으로 부처님전에 가서 천도불사라도 하려고하니 시신을 그곳으로 옮겨달라하였다. 그래서 강씨부인은 남편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불영사 절탑앞에 꺼내놓고 불철주야 삼일을 울면서 기도를 하였다 부처님 저의 남편 이부사를 다시 살아나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 살던것을 부처님영험으로 부사를 시켜주셨으니 부처님께서 다시 그를 살려주시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십시오
이대로 남편과 헤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해서 저역시 살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부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강씨부인의 애절한 원을 옆에서 듣고있던 스님들도 그만 감동이 되어 목탁을 들고나와 함께 불철주야 삼일을 기도를 올렸더니 홀연히 그 영구사이에서 머리를 풀고 입술이 붉은 여자귀신이 나타났는데 그 원귀가 하는 말이 나는 저이와 구생에 원한을 맺은 원수인고로 어느때 어느곳에서든지 세상의 낙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해왔다 그러나 저 부인의 간절한 서원과 스님네들의 애절한 독경으로 나는 구생의 원한을 풀고간다
그리고 나서 하늘로 둥둥떠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모두 놀라 멍하니 서있는데 갑자기 관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깜짝 놀란 강씨부인이 급히 달려가 줄을 끊고 관을 떼어 수의를 헤치니 이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님들과 관속들이 부사를 업어 절방으로 모셔들이니 이부사는 삼일만에 정신을 찾아 기동을 하였는데 이래서 지어진 현판이 현판이라는 것이다

인현왕후에 얽힌전설

조선 숙종 때였다.
왕비 인현왕후는 후궁의 모함으로 쫓겨나게 되어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왕비는 그날 밤 꿈에 한 스님을 만났다.
『소승 불영사에서 왔습니다. 내일은 상서롭고 좋은 일이 있을 테니 마음을 돌려먹고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과연 이튿날 후궁의 못된 음모가 탄로나 왕비는 무사히 환궁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불은에 감사하는 뜻으로 절산 10리 사방을 하사하였다. 절산 10리 사방의 방대한 부동산은 지금까지도 불영사 소유로 유지되고 있다.

 

경북 울진 불영사 의상전은 인형왕후의 복을 비는 ‘인현황후 원당’인 것으로 확인됐다.

불영사(주지 일운스님)는 최근 의상전을 수리하던 중 의상전 서쪽 종도리 바닥 사각홈에서 한지에 묵서로 쓰인 상량문 1기를 발견했다. 상량문 발견으로 그동안 불영사와 관련된 인현왕후의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1933년에 작성된 〈불영사사적비〉에 따르면 ‘숙종이 장희빈 때문에 인현왕후를 폐출한 후 왕비가 자결하려고 하자,

꿈에 불영사에서 온 한 고승이 내일 좋은 일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하고 그 이튿날 장희빈이 꾸민 사건이 밝혀지고

왕비가 궁으로 환궁해 그 불은에 사례하기 위해 불영사 사방 10리를 하사했다’고 적혀있다.

또한 이번 상량문 발견으로 이 건물의 창건시기와 창건에 참여했던 사람들, 그리고 불영사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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